• 한국의 공산주의자들 ⓸ 박헌영의 그림자

      날짜: 2020. 04. 04  글쓴이 : 양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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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공산주의자들 박헌영의 그림자

        (이호목사 강의안)

         

        1. 한국 전쟁 전후의 박헌영

        #1. 1949. 9 박헌영의 어린 신부, 윤레나(윤옥)

         

        1950. 4 조선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전쟁에 의한 통일노선 지지

        김일성, 무력통일이 단 하나의 옳은 현실적인 정책이다”,

        정치위원 전원이 만장일치로 적극적으로 이 방안을 지지해주기를 요망한다

        박헌영, 만일 인민군이 남하한다면, 20만의 남로당원들이 군사작전을 원호할 것으로 믿는다

         

        #2. 1950. 6. 박헌영의 방송 연설 남반부의 로동당 전체 당원들과 전체 인민들에게

        적의 후방에서는 첫째도 폭동, 둘째도 폭동, 셋째도 폭동입니다.”

         

        #3. 1952. 4. 12 박헌영의 글, “김일성 동지의 탄생 40주년에 즈음하여

        조선 인민의 가장 우수한 아들이며 경애하는 수령

        스탈린의 충실한 제자”, “항일무장투쟁에서 불멸의 위훈을 세운 김일성 동지”,

        조선인민의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경애하는 지도자

        김일성 동지의 이름은 조선인민의 승리의 상징

         

        2. 김일성의 남로당 숙청

        1953. 3. 5 소련 스탈린 사망. 이승엽, 이강국 등 남로당 출신 간부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연루자로 체포

         

        1953. 7. 27 휴전협정, 3일 후 남로당 출신 기소 : 미 제국주의를 위해 감행한 간첩행위 남반부의 민주역량 약화 또는 파괴 음모와 테러 공화국 정권 전복을 위한 무장폭동 준비.

         

        측근들의 배신, 박갑동의 기록 : “전원이 시나리오의 대사를 외듯 자기들의 범죄 사실을 말하고, 살려만 주면 공화국의 충실한 일꾼이 되겠다고 했다. 그들의 최후진술은 하나같이 추악함의 표본이었다. 사람이 이처럼 비굴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들은 그 비굴로써도 생명을 건지지 못했다.”

         

        #4. 김일성의 개냐, 총이냐 : 너희들이 쓴 대로 다 인정하겠다. 빨리 총살하라.”

         

        #5. 1955. 12. 15 “피소자 박헌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러 및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

        박헌영의 법정 최후 진술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겠다. 그대들 말대로 나는 미국의 스파이였다고 하자. 모든 것은 내가 주도했을 뿐 남로당 간부들은 전혀 책임이 없다. 그들은 모두 조국의 해방과 통일, 사회주의 혁명과업을 위해 밤낮으로 일해 온 정직한 애국자들이다. 나에게 떨어진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달게 받겠으니 죄 없는 남로당 간부들을 용서해달라. 거듭 부탁한다.

         

        3. 박헌영의 최후

        1956. 7. 19 총살

        부인 윤레나의 어린 두 자식을 외국으로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키라는 말을 김일성에게 전해 달라

        역사의 날조자, 혁명의 찬탈자, 민족의 반역자, 인민의 원수 김일성을 타도하라

         

        박갑동 : 하나의 인간이 평생을 몸 바친 공산주의 체제의 정치 속에서 어떻게 되어 갔으며, 그가 얻은 인생의 소득이 무엇이었나를 세상에 밝혀두고 싶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19515, 북한에서 박헌영의 초조한 듯한 마지막 모습을 본 일이 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가 마지막 사형대에 올라섰을 때, 순간 하나의 인간으로서 무엇을 생각했었을까. 최후의 형장에 섰을 순간 그의 뇌리에는 어떤 상념이 떠올랐었을까. 아마 그가 천진하게 자란 고향 충남 예산군의 어느 따뜻한 양지바른 산천과 부모들의 얼굴, 또는 평생 그를 따랐던 친구나 동지들의 얼굴들을 그리며, 그리고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절감하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천행으로 자유의 품에 안긴 이래, 나는 공산주의자란 인간의 사고로 창조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비정한 정치체제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왔다. 박헌영의 죽음을 통해 볼 때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 북한에서 박헌영이 누명을 쓰고 김일성에게 죽는 바람에 남한 출신의 사십만 명이 굶어죽고 얼어 죽었다. 그들의 명복을 빈다는 한마디 소리도 못하고 나는 이 글을 끝마친다.”

         

        이병주, 1987. 10. 28 <조선일보> 작가 인터뷰 : “남로당은 한마디로 우리 역사의 그늘진 부분입니다. 한국의 뛰어난 인재를 모아 민족에 죄를 지은 허망한 단체였지요. 그 비극의 역사 속에 명멸해간 인재들은 아깝기 짝이 없으나, 그들이 한 짓은 괘씸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즈음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이 많이 읽어주었으면 해요. 그래야 우리 민족의 슬픔도 알 수 있고, 마르크시즘이 만능의 사상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게 될 테니까요.“

         

        4. 남겨진 가족들

        주세죽, 1938. 6월 이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주에 거주. 코민테른 육아원 교사, 레오노르 에스테베스바렐라의 회고 그녀는 자신이 몹시 사랑했던 딸과 함께 살 수 없었던 사정으로 해서 매우 고통스러웠다. 모녀간에 서로 사랑을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비비안나가 자신을 친엄마처럼 대하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이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어머니가 어떠한 존재이며 어머니가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비비안나에게 이야기해 줄 것을 나에게 부탁했다. 그녀는 이따금 과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하곤 했다. 당시 그녀는 심장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다정다감한 눈은 슬픈 빛을 띠기도 했다.”

         

        1946. 5. 5 주세죽이 조선 귀환을 허용해 달라는 청원서를 스탈린 앞으로 보내다

        박비비안나의 회고 1946년에야 비로소 내게도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크질오르다에 유배중인 어머니께서 편지와 프라우다신문의 기사 일부를 오려서 보내셨다. 신문기사 중에는 조선공산당의 총비서 박헌영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 어머니께서는 박헌영이라는 부분에 밑줄을 쳐놓았고, 편지에서 바로 이분이 나의 아버지라고 적어놓으셨다. 이렇게 하여 내게도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46년 내가 18세가 되던 해 여름에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일단의 한국인들과 함께 비공식적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셨던 것이다. 물론 나는 그 분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당장 느낄 수는 없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 없이 육아원에서 성장했다. 나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존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란 셈이다. 당시 어머니는 크질로르다에 유배되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 사실을 1994년 여름에야 비로소 알았다.”

         

        #6. 1953년 말, 주세죽 사망

         

        #7. 박헌영과 정순년 : 백일이 채 못 되어 친정아버지와 어머니가 찾아와가지고 스님을 버려두고 끌려가는데, 그것은 말로 다 못해. 엄청났어. 집에 끌려가 공방에 감금당한 채 일 년이 넘도록 감옥 아닌 감옥생활을 했지. 그 다음해에 한 목수한테 어거지로 시집을 가게 되었고. 그것이 선생님과 할머님, 스님 모두와의 생이별이었지.”

         

        #8. 원경, 14가지 이름, 23세에 생모(生母)를 만남, “밀려오는 번민, 갈등, 공허감, 무상함, 덧없음

         

        #9. 원경과 박원순 #10. 역사 문제 연구소의 대표작 <이정 박헌영 일대기> , <이정 박헌영 전집>

        원경은 10여년 동안 진행된 작업에 소요된 모든 경비를 지원하였고, 실질적으로 작업을 지탱해왔다. 원경 본인은 자료의 발굴과 보존을 필생의 작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역사문제연구소 설립을 주도하고 지속적으로 그 운영에 관여해온 것도 실은 자료작업과 관련된 것이었음을 피력한 적도 있다.” - “<이정 박헌영 전집>을 펴내면서 - 전집 편집작업, 10여년의 고투

         

        미국에 유학하고 있던 한홍구 선생은 그때까지 학계에 소개되지 않았던 <세계와 조선>이라는 해방 후 박헌영의 저작을 기꺼이 복사해주었다.”

         

        #11-12. 이승만을 세월호 선장에 비유한 한홍구의 발언

        김일성은 우리 민족이 가장 암울한 상태에서 혜성같이 나타나 많은 것을 성취한 지도자

        김일성은 귀족 영웅이 아닌 자수성가형 민족 영웅”, “혁명의 창건자이며 부국강병에 기초한 근대화를 추구한 20세기형 민족주의자이자 철저한 실용주의자

        #13. 남민전과 임준열

        남조선 민족해방 전선(남민전)의 주도자 이재문이 김일성에게 보내는 서신, 초안 작성자가 임준열

        “... 국제공산주의의 운동사에서 김일성 원수님께서 독창적으로 창시하신 주체사상으로 사상, 기술, 문화 3대혁명을 거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5천만 조선민족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조국이요 아세아동방의 사회주의의 강력한 전진기지이며 블록 불 가담 나라 반제투쟁의 영향력 있는 지도국으로 그 위광은 날이 갈수록 찬연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조선은 패망한 일본제국주의의 자리를 빼앗아 미군이 상륙한 날로부터 미제국주의자와 그들의 앞잡이에게는 지상천국으로 되었으나 모든 남조선인민들에게 그네들의 착취와 억압에 신음하는 창살 없는 감옥으로 되어 있습니다.

         

        ... 남조선혁명은 남조선인민의 힘으로라는 김일성 수령님의 교시를 높이 받들어 용약 결집된 남조선민족 해방애국전선 준비위원회에는 혁명가와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소시민, 교수와 언론인, 문인, 군인, 여성 등 각계각층 대표가 참가하고 있습니다. 항일 빨치산 투쟁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기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전사들은 불굴의 투지와 결의 규율 인민대중에 대한 무한한 헌신성으로 남조선에서 외래제국주의자와 그들의 앞잡이를 쓸어버리고 남조선 인민들을 착취와 억압에서 해방하고 강산을 뒤흔드는 만세의 함성과 함께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원수님께옵서 인도하는 조선민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품 안으로 안기는 영광스러운 조국통일의 그날을 앞당기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원수님 만세! / 조선노동당 만세!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남조선민족 해방전선승리 만세! / 조국통일 만세!

        1977117일 서울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중앙위원회 드림

        ---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 노무현 정부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

         

        #14. 민족문제 연구소와 임준열 임헌영 : <친일인명사전>,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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